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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 학생(6867)
저는 지금 고등학생이지만, 이 이야기를 꺼낼려면 초등학교떄로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전 초등학생때 집안 사정으로 인해 한 학교에 2년 이상을 머무르지 못하고, 다른 지역으로 전학을 다녔습니다.(부모님은 계속 계시고 저만 따로 학교만 전학 다니던 상황) 그래서 인지 학교에서 적응을 잘못하고, 친구들도 잘 못사귀고 힘드었습니다.
그리고 초등학교 5학년 중반기때 겨우 정착을 해서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때에는 친구를 많이 사겨보자고 다짐한뒤 중학교를 입학했습니다.
하지만 기대와는 달리 초등학교때 친구들이 많이 없어서인지 다른 아이들과 친해지지 어려웠고 친구라는 개념이 점점 잊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중학교때에는 주변 반아이들이 착하고 순진해서 같이 조금 어울려 다녀서 그렇게 까지 힘들게 보낸거 같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를 입학한 후였습니다.
고등학교는 다양한 아이들이 모여있고 그만큼 성격도 다 제각각이어서 어디에 맞춰야 할지 적응하기 힘들었고, 다가가기도 힘들었습니다. 그래서인지 더 위축되고, 혼자인 느낌이 자주 들었습니다. 저한테는 ""친구란 마음속 이야기를 꺼낼수 있고 들어주는 그런 사람""이라서 친구를 두루두루 사귀는 거 보다는 한명이라도 깊게 사귀는 편인지라 누구에게나 마음을 못연것도 있습니다.
그렇게 1학기를 보내다가 (한 친구의 이름을 A라고 하겠습니다.) A라는 반친구가 저한테 있어서는 가장 고마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 A 라는 친구는 학급임원 이었는데, 부모님들끼리 친하셔서 그 친구의 부모님이 저를 좋아해 주셔서 어떨결에 친해진 친구입니다.
덕분에 A라는 친구와 친해졌고, 그나마 말을 편히 걸수있고, 장난도 칠수있게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날 정말 힘들어서 학교 정규 수업시간도 빠지거나, 아니면 학교 자체를 안가게 된 날도 있엇습니다. 이날 A가 저에게 ""괜찮냐고"", ""별일없냐고"" 문자를 보내주고 ""내일은 올거지?'라고 걱정해주었을때 저는 울컥했고, 한편으로는 고마웠습니다. 어른이나 부모님이 아닌 친구에게 그런 걱정을 받은적이 한번도 없었기에 그만큼 값지고, 고마웠고, 울고 싶었습니다.
이 메세지를 보고 '아 내일은 반드시 가야겠다.','가서 걱정해줘서 고맙다고'라고 말해야지 하면서 진심을 전해야지 하고 갔습니다. 만약 A가 아니었다면 저는 어디론가 훌쩍 떠나버릴 마음이 있었고, 그러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A를 통해 마음을 다잡고 메세지를 받은 그날 사이버 상담선생님께 상담도 받아보고, 주위 여러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했고, 학교에 무사히 다니고있습니다.
A라는 친구에게는 고맙다는 인사와 그동안 힘들었던일 집안사정 등을 예기 하면서 그친구에게 더 기댈수 있고, 제가 학교를 다닐만한 이유를 제공해준 정말 정말 고마운 사람입니다.
그 친구는 항상 예기를 들어주고, 자주 귀찮게 하게 했습에도 불구하고 짜증이나 화를 내지않아 주고 그냥 늘 곁에 있어준거 같습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그 친구에게 고맙고 왜 인지 자꾸 눈물이 납니다... A는 저에게 있어서 버팀목이고 나무 같은 존재 인거같습니다.
제가 A에게 고마움을 느끼다보니 항상 하나라도 더 챙겨주고 싶은 마음이 생겨서 항상 하나씩 무엇이든 추려고 챙겨다녀서 주다보니 덕분에 나눔의 기쁨을 알게 되었고, 그로인해 나로 인해 누군가가 행복해질수 있구나를 느꼇습니다. 그래서 저는 꿈을 누군가에게 행복을 줄수있는 일을 해보자고 다짐했고, 지금은 요리사나 제과제빵을 배워서 제가 만든 음식으로 행복을 나눠주고 싶다고 꿈을 정했습니다.
A 라는 친구는 누구에게는 그냥 평범한 친구일수 있지만 ,
저에게는 정말 소중하고, 고맙고, 항상 든든하고, 지금까지 저를 버틸수 있게 도와준 친구에게 항상 고맙게 생각하고 감사한 마음을 표현하고 싶어서 이 글을 썻습니다.
긴 글이었지만 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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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은* 학생(7171)
안녕하세요 저는 현풍중에 재학중인 1학년 1반 성은혜입니다.
저희 학교는 1952년 5월 2일에 설립되었습니다 그리고 저희 지역에서는 3개의 학교가있는데요. 저희 학교는 145명의 학생과 19명의 선생님이 계십니다. 저희 학교는 2017년 1차 학교폭력 제로학교 표창 수령을 받았습니다. 따라서 저희 학교학생들은 선.후배 간의 사이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2018년 3월에 입학하였습니다 저는 막 중학교를 넘어어온 학생이죠.
자희 학년은 두개의 반 으로 되어있고 1학년 총 학생은 45명입니다. 근데 저는 1학년 1반 회장이자 친구들의 나무였습니다 반장으로 써 힘들일이많고 새로운 친구들과도 만나고 전학생도 적을을 잘 할 수있게 도와주려고 애를 썻습니다. 저는 6학년때 조금 친구들에게 은따 같은걸 당했습니다.제일 친하던 친구들이니깐 많은 충격을 받았죠 저는 그때는 정말 많이 친구가 뭐지라는 생각을하면서 중학교를 올라오게 되었습니다. 반이 배정되던날에는 진짜 어릴때부터 친했던 친구랑은 떨어질까봐 걱정속에서 반을 확인했습니다 다행히도 같은반이였습니다.
저의 초등학교에서는 23명의 친구들이 같이 현풍중을 배정받았습니다. 근데 그렇게 친할정도가 아니여서 친해지고 싶은 마음은 컸습니다. 반으로 올라가 반에 들어가는데 모르는 친구들이 천지였습니다. 저는 정말 걱정은 컷습니다. 저는 정말 힘들었을때 6학년 선생님께서 은혜야 너는 뭐든지 잘이루어낼 수 있어 걱정하지말라는 말이 떠오르고 저는 시간이 흘러 지금인 9월로 흘러 올라왔습니다. 이제 학교에는 완벽적응이되었고 친구들과는 비밀을 털어놓을 수 있는 사이가 되었죠 저는 정말 우리반 친구들이 한명은 성별상관없이 저에게는 보석같이 소중한친구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힘들땐 포기하지 말라며 넌 정말 최고고 너는 정말 잘하고 있다며 말을해주었습니다. 저는 정말 힘들때는 죽고싶은 생각이들 정도로 힘들었습니다.
이번에 깨달게 되었습니다. 친구가 무엇인지 뒤에서 욕하고 따돌리는것은 정말로 비겁하고 친구라는 말도 붙일수 없이 추악한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점심시간에 친구 한명이 어떤아이를 실수로 밀쳐 국을 쏟게되었습니다. 그 친구는 괜찮다며하고 쏟은 친구는 휴지를 빨리 가져오고 있더군요 저는 정말 1학년1반이 나 자신이 먼저가 아닌 친구들을 먼저 위한것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수업시간에 모르는 문제가 있으면 묻고 답하여주고 점심시간에 모르겠다며 오는친구에게도 문제를 같이 풀어주는 모습을 봤을때 정말 친구를 많이 생각하는것이라고 많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친구가 무거운 물건을 들었을때에는 먼저다가가 들어주고 친구가 울고있으면 놀리는것이 아니라 먼저 달래주는 모습을 종종 보았습니다.
혹시 아파보이면 부축하여 보건실도 데려다주고 친구가 말을 못할상황이였으면 옆짝꿍이나 다른 친구가 선생님께 말해주기도 하였습니다.많약 여학생들이 마법걸린 날에는 남학생들이 더욱더 이해를해주고 조심할려는 모습까지지 보이기도 하였습니다. 저는 정말 친구들에게 받기만 했다는생각이 많이 들었습니다.이제는 23명모두가 퍼즐같습니다. 퍼즐은 한조각이 빠지면 완성할 수 없는것 처럼 저에게는 한명한명이 저에게는 없어안될존재이고 누구 하나가 빠지면 섭섭할 존재입니다.친구들은 제가 다가가기도 전에 먼저 다가와 말을 걸어주던 1학년 1반 친구들 입니다.
저의 미담꾼은 누구 한명이 아닌 저희반 22명(저 포함 하지 않음) 모두가 저의 미담꾼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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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 학생(0583)
제가 소개해드릴 선생님은 제가 가장 존경하는 고등학교 1학년 때 담임선생님 이십니다.
내년에 명예퇴직을 앞두고 계실만큼 연세가 있으신 선생님 입니다.하루는 제가 몸이 많이 아픈 날이었습니다. 시험 준비로인해 스트레스를 받은 나머지 감기 몸살로 학교에서 수업조차 제대로 듣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약이라도 타고자 병원에 방문하려고 했습니다.
평소같았으면 조퇴를 했겠지만 고등학교 첫 시험인지라 야간자율학습은 빠지기 싫어 외출을 하려고 했습니다. 담임선생님께 찾아가 외출증을 부탁드렸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저희 학교와 제가 다니던 병원의 위치는 차로 약 20분거리인데다가 시내버스는 30~40분에 한대씩 있어 저녁시간 1시간으로는 시간이 부족했습니다.
우선 외출증을 끊고 생각하려던 제 마음을 읽으셨는지 제게 다녀올 차편은 되냐며 먼저 물어봐주셨습니다. 저는 잘 모르겠다고하니 두말하지 않으시고 따라오라더니 저를 병원까지 태워다 주셨습니다. 진료비까지 챙겨주시고는 저를 병원에 들여보내셨습니다.
병원에서 진료를 마치고 나오자 선생님께서는 따뜻한 음료를 건네시며 너무 무리하는거 아니냐며 제게 안부를 물으시고는 다시 학교로 태워주셨습니다. 이후 며칠 뒤 안 사실이지만 당시 선생님께서는 저 때문에 저녁식사도 못하신 채 바로 야자감독까지 하셨다고 하십니다.
이 소식을 들은 저는 마음한켠이 뭉클해지며 저 또한 선생님이 되어 이렇게 받은 은혜를 제가 가르칠 학생들에게 돌려주겠다고 마음 먹었습니다. 고등학교 3학년이 된 지금까지 같은 학교에서 저를 전폭적으로 지원해주시며 아껴주시는 선생님께 명예퇴직 전 좋은 추억이 되어드리고 싶습니다.
저희 선생님과 제게 꿈과 같은 기억을 만들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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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은* 선생님(9672)
유난히도 무더웠던 올여름에는 나에게 특별한 경험이 있었다.
저는 올해 교직경력 30년이 되는 해이다. 저의 전공은 한문으로 대부분 인문계고등학교에서 근무했었는데 작년에 특성고로 전근 와서 올해 2년차가 되는 해이다. 학교 여건상 작년에도 부장과 2학년 식품가공과 담임을 했는데, 금년에도 부장과 1학년 건설시스템학과 담임을 하고 있다.
저희학교는 보령의 주산면에 위치해 있는 산업고등학교이다. 금년 3월에 담임반 학생은 15명인데 10월 1일 현재는 12명으로 3명의 학생이 가출과 학교생활부적응으로 자퇴를 하였다. 재학생 12명중 1명은 입학 전에 절도사건으로 인하여 3월10일부터 9월 30일까지 위탁교육을 받고서 돌아왔다.
위탁교육 중에 담임교사와 몇차례의 편지를 주고받았다. 또한 위탁교육을 받고 있는 전주송천정보통신학교에 반학생 들에게 편지를 쓰도록 지도하였으며, 담임교사인 저도 2번의 면회를 다녀왔다.
지금부터 위탁교육을 받은 최*상 학생과의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입학 후에 학생과 개인면담시간에 학생은 조심스럽게 자신의 과거를 털어놓았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학생은 중학교 시절에는 운동(레스링)을 해서 체육고등학교에 입학하였으나 부상으로 인하여 중도탈락하고 재수후에 입학한 상태였다. 그리고 입학 전에 친구들과 선배들과 함께 인형 뽑기 집에서 절도를 해서 재판을 받아야한다고 하였다.
이런 상담이 끝나고 3월 중순에 최*상 학생은 대전교도소에서 재판을 받고 5월에는 학력이 인정되는 전주교도서 송천정보통신학교에 있었다. 교직경력 30년이 되는 저는 담임반 학생 때문에 소년원에 면회 가는 일이 첫 경험이었다. 면회 갈 때 학생과 먹을 통닭과 도시락을 준비하면서 ‘한 아이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라는 말이 생각났다. 좀 위축된 모습으로 면회를 신청하고 학생을 만나 면회하면서 학생을 자신의 삶을 반성하면서 잘 적응하는 것으로 판단되었다.
하지만 자신의 생각보다는 주변에서 많은 유혹이 있을 것으로 생각되기에 자신의 마음을 컨트롤하는 힘이 필요하며, 남을 배려하는 마음으로 생활했으면 하는 당부의 말을 했다. 학생은 그 속에서 아주 성실하게 생활하면서 한자, 컴퓨터 자격증을 취득하고 자신의 미래를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참으로 기특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학생과 이야기하면서 진솔함을 보았으며, 학교와 반 학생들에 대한 그리움이 많은 것을 알 수 있었다.
오늘은 10월 1일, 유난히도 청명한 가을에 위탁학생인 최*상이 학교에 와서 반 학생들과 함께하면서 학교생활을 하는 첫날이다. 이에 학생부장에게 학생을 만나 볼 수 있도록 하였다. 지금의 심정으로는 무사히 1년을 마치고 졸업을 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또한 몇 년이 지난 후에 사회의 일원으로 성장하는 모습을 생각하며 오늘도 반 학생들과 함께 하루하루를 소중하고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지금의 마음이 영원토록 변하지 않으며 학생에게 늘 관심을 가지고 힘을 줄 수 있는 교사가 되려고 다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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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혜* 선생님(3267)
내겐 너무 예쁜 그녀 ~
키는 160cm가 넘고 몸무게도 60kg이 훌쩍 넘는 그녀의 이름은 김세미입니다.
안경을 꼈고, 늘 머리를 하나로 질끈 묶고 다니는 세미는 멀리서 보면 어른 같은데
속은 여리디 여린 13살 소녀였지요. 그래서 저는 세미를 ""요정""이라고 불렀어요.
처음엔 "" 요정"" 하고 부르면, 어색해하고 '선생님이 나한테 장난하나?' 하며 별로
좋아하지 않았어요. ""요정""하고 부르면 반 아이들도 다같이 웃곤 했지요.
외모와는 달라도 너무 다른 별명이었으니깐요. ^^
그런 세미와 일년을 보내면서 말 한마디가 사람을 살릴 수도 있고, 죽일 수도 있다는 걸
마음 깊이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처음에 세미는 정말이지 자신감이 없었어요. 겉으론 누구보다 밝았지만, 조금만
속을 들여다보면 뚱뚱한 외모로 인해서 자존감이 매우 낮았어요. 남들 다 입는 치마한번 4년동안 입어보지 못했고, 이쁘고 날씬한 친구들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어 툭 건드리면 ‘ 나도 한번만 저렇게 날씬해 봤으면...’ 하면서 눈가가 촉촉해졌지요. 정말 똑똑한 아이인데 낮은 자존감은 그녀의 학습면에서도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었어요. 그래서 발표할 때도 주변의 친구들의 시선을 매우 의식해서 하고 싶은 말을 제대로 못했지요. 그랬던 세미에게 “요정”이란 새 이름이 생기고부터 신기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 요정 ” 하고 부르면 못 들은 척 하다가 “ 세미요정” 하고 부르면 활짝 웃기 시작했습니다. 발표를 할까 말까 머뭇거리고 있을 때 “세미요정이 한번 해봐요.” 그러면 마지못해 한다는 듯 억지로 하는 듯 했지만 곧 자신의 생각을 술술술 말하기 시작했지요.
그렇게 “세미요정”이란 단어가 아이들 귀에도 익숙해질 무렵 사회시간에 시골처녀, 도시총각 성토대회를 했어요. 세미요정이 시골처녀 대표로 뽑혔고 도시의 장단점을 도시총각과 설전을 펼쳤는데 어찌나 사투리를 구성지게 하던지 모두 배꼽을 잡았지요. 그 후로 무슨 토론이나 설전의 당골이 된 세미요정은 점차 학급활동에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어요. 아무도 그녀를 더 이상 무시할 수 없는 영향력있는 인물이 된 것이지요.
한번은 아이들과 ‘온리유 프로젝트’를 기획해서 주변에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물색해서 우리의 재능으로 돈을 벌어 그 돈으로 필요한 물건을 사서 직접 방문해서 재능기부와 물품을 전달하는 프로젝트를 했는데 거기서 그녀는 거의 주연배우였어요. 기획, 실행, 방문까지.... 다 전달하고 집에 오는 길에 그녀는 이렇게 말했어요.
“ 선생님, 저 사실 제가 요정같은 외모가 아닌 것 잘 알아요. 근데 선생님이 저를 그렇게 불러주셨을 때 놀린다고 생각해서 처음엔 기분이 나빴거든요. 근데 계속 웃으면서 불러주시니깐 나중에 착각하게 됐어요. 내가 진짜 요정 같은가? 하구요. 그리고 친구들도 그렇게 불러주니 제가 진짜 요정이 된 것 같았어요. 자신감이 생겼고, 지금의 제가 된 거예요. 선생님..고마워요.” 그렇게 그날 그녀는 진짜 요정이 되었어요.
사랑과 바램을 잔뜩 담아서 한 그 말 한마디가 그녀를 살렸어요. 그녀는 요즘 전학교를 주름잡고 날라다닌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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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미* 선생님(2567)
인생을 살아가면서 자신을 이끌어주실 참 스승을 만나게 된다는 것은 실로 귀한 행운이며 행복일 듯 합니다.
제가 지금 교직12년차로 열심히 살아가는 원동력을 제공해주신 저의 평생 은사님이시자, 저의 인생 멘토 엄복기선생님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때는 바야흐로 25년전, 아주 작은 시골마을 학교에 다니던 저는 바쁘신 맞벌이 부모님 밑에서 삼남매의 둘째로 자라서 큰 관심 못받고 남의 눈에 띄지않은 아이였습니다.
공부도 잘못해서 더더욱 관심을 받지 못했지요. 그러던 제가 3학년이 되면서 학교에 새로 부임하셨다는 무섭다는 소문이 무성한 엄복기선생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선생님은 엄격하고 무서워서 호랑이 선생님으로 불리셨지요. 학기초, 공부를 못했던 저는 참 많이 혼나기도 하고, 틀린 것 10번 쓰라는 숙제로 새벽 1,2시에 자기 일쑤였습니다.
그때 살도 좀 쪘었는데 학교 근처 사택에 사시는 선생님께서 밤마다 저랑 뚱뚱한 친구들을 불러 함께 운동장10바퀴를 달리기도 했지요. 선생님은 왜 그러셨는지 눈에 안띄게 행동하는 저에게 많은 경험을 하도록 해주셨습니다.
재능도 없는데 서예도 배우게 해주셨고(서예 가르치는 교장선생님께서 절 빼자고 하셨는데도 가능성이 있다며 추천해주셨어요), 몸치인 저를 에어로빅반에도 넣어 주셔서 학예회때 앞에 서기도 했습니다. 많이 혼나기도 했지만 선생님의 지대한 관심덕택에 많이 성장했습니다.
2학기말에 학기말시험을 친 다음날, 선생님께서 갑자기 저를 앞으로 부르셨습니다. 당연히 또 혼나겠지 싶어 긴장하며 앞으로 나갔는데 왠걸요. 환한 미소로 저에게 1등했다며 색연필을 선물로 주셨답니다. 그때 그 기억이 제 인생에서 잊지 못한 순간이었답니다.
자존감 낮았던 저는 자존감이 회복되었고 나도 할 수 있구나, 관심받고 있구나란 생각에 많이 행복했습니다. 6학년을 졸업하고 전 더 큰 시로 이사오면서 선생님과 연락이 끊겼답니다. 어찌어찌 번호를 알게되어 연락을 드렸습니다. 저를 기억하실까 걱정했는데, 대번 이리 말씀하셨지요.
어찌 너를 잊겠냐며. 그 이후에 전 계속 조그만 소도시에서 전교권을 달리며 교대에 입학을 했고 선생님처럼 멋진 선생님이 되어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답니다.
지금 어찌 지내고 계시나요?
제겐 설리번선생님과도 같은 엄복기선생님 보고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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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이* 선생님(3140)
서기 2003년, 원주...
나이 서른 셋. 직업 초등학교 교사(6학년 담임)....
한 달 전 평소 휴대폰 화면과는 다른 색이 나타나면서 벨이 울렸다. 이건 뭐지 하다가 눌렀는데 연결이 되었다.
화상전화... 낯이 익은 거 같기도 하고 아닌 거 같기도 한 아이들이 소리를 지른다. 뭔 내용이 오갔는지 기억이 없다. 끊고 나서 잠시 후 부천에 가서 선생님 뵙겠다는 메시지가 왔다. 숙소는 어디를 예약해야 할까? 1차는 뭘 먹고 2차는 어디로 가야 할까?.... 그러는 사이 한 달이 훌쩍 흘렀다.
서기 2018년 12월.
2003년에 담임을 맡았던 아이들이 부천으로 왔다. 남자 둘 여자 셋...
방을 잡고 평소 자주 가던 삼겹살집으로 아이들을 데려갔다. 제자들과 건배를 하고 남자 둘 중 조금 더 잘생긴 제자가 구워주는 삼겹살을 안주로 먹었다. 2차로 역시 자주 가던 카페로 가서 술을 마셨다. 그리고 3차로 노래방에 가서 노래를 불렀다. NRG라는 그룹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하는 데 제자들이 그 그룹의 노래를 불렀다. 제자들도 벌써 흘러간 물이 되고 있었다.
따라주는 술을 마시다 혹 제자들 앞에서 실수할 까 두려워 먼저 간다고 하고 나왔다. 남자 둘 중 조금 덜 생긴 제자가 따라 나온다. 스승님이며 인생의 멘토 어쩌구저쩌구 했던 거 같다.
아이들이 두고 간 것이 너무 많다.
선생님과 같이 찍은 사진과 함께 써 준 편지를 들고 온 아이, 모든 아이들에게 특화된 방학숙제를 내 준 이야기를 하는 아이, 수학여행 가서 교감선생님과 다른 반 선생님들 몰래 우리반 아이들 데리고 노래방을 갔다고 하면서 <먼 산 언저리마다 너를 남기고 돌아서는~~~~> 당시 선생님이 노래방에서 불렀다고 흉내 내던 아이, 지겹게 시를 쓰라고 했고 꼴찌를 위하여 라는 노래를 반가로 정해 강제로 부르게 했고 사물놀이를 가르쳐 주셨고, 6학년 유일한 남자샘이라고 했고 쉬는 시간마다 다른 반 아이들이 우리 반을 부러워하며 우리 반 교실 문 앞에서 줄 서서 구경했다고도 했다.
27살 아이들이 6학년 담임 선생님을 찾아 강원도에서 부천으로 왔다. 23년 교직 생활동안 6학년 담임만 15년 이상 해 왔다. 졸업식을 할 때마다 제자들과 소주 한 잔 기울이는 꿈을 꿨던 거 같다. 48살을 한 달 남기고 아이들과 술을 마셨다. 내내 그리움과 설레임이 주변을 떠나지 않았다. 교직 생활 하면서 누군가를 가르치는 선생이 되고자 한 적이 없었다. 그저 놀아주고 다독여주는 옆집 아저씨나 친한 삼촌이길 원했다. 그런 내 교직관은 내림굿을 받느라 시퍼런 작두 위를 걸어가는 무당처럼 항상 위태로웠는데 이번 제자들의 만남은 그런 위태로움을 없애주는 씻김굿처럼 나를 강박증에서 벗어나게 해 주었다.
“선생님, 제가 결혼할 때 꼭 주례 봐 주세요”
“저도요”
“저도요”
자주 가는 카페에서 강허달림의 <기다림 설레임>을 들으며 여섯 개의 엄지손가락은 건배하는 술잔처럼 한 곳으로 모아졌다. 내 손가락이 가장 짧다. 그렇지만 우리들의 손가락은 닮았다.
아이들과 닮은 손가락을 가진 나는 그날 가장 행복한 교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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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해* 선생님(1982)
선생님의 선생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저는 현재 중학교에 재직 중인 교사입니다. 학생들과의 미담도 많겠지만, 오늘은 제 고등학교 때 은사님의 이야기를 전하려고 합니다.
제가 고등학교 2학년 때 일입니다. 야간자율학습만 하면 왜 그렇게 배가 고픈 걸까요? 그날도 친구와 몰래 도망을 나와 떡볶이를 먹고, 2차로 노래방까지 가서 신나게 놀았습니다. 놀 때는 세상을 다 얻은 듯 즐거웠지만 그것도 잠시뿐이었고, 다음날 선생님에게 혼날 생각을 하니 마음이 갑갑해졌습니다.
다음날 아침, 우리는 담임선생님의 반응에 놀랐습니다. 화를 내시기는커녕 어제는 잘 놀았냐며 환하게 웃어주시는 겁니다. 게다가 공부하기 싫을 때 억지로 앉아 시간만 때우는 것보다는 차라리 신나게 놀고 다음날 열심히 하는 게 낫다고, 잘했다고 칭찬을 해주시는 겁니다. 다음에 또 공부가 하기 싫은 날이 있으면 선생님에게 문자 메시지 하나 보내달라고, 그럼 야자 빠지는 것 허락하겠다면서요. 대신 하루 놀고 그 다음날은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는 당부도 잊지 않으셨어요.
선생님의 이런 반응에 처음에는 어안이 벙벙했습니다. 하지만 그 이후에도 선생님은 항상 우리를 믿어주시고 우리의 편이 되어주셨습니다. 혼을 내기보단 우리의 이야기를 듣고, 이해하려고 노력하셨습니다.
대수롭지 않은 일 같지만, 제가 교사가 되고 보니 이게 얼마나 힘든 일이었는지 깨닫습니다. 학생들이 크든 작든 규칙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면 혼부터 내게 되거든요. 교사의, 어른의 입장에서 옳고 그름을 나눠놓고, 그 기준에 맞추려고 하죠. 저는 학생들의 행동에 화가 날 때, 저의 담임선생님을 떠올립니다. 그리고 그분처럼 학생의 마음을 읽는 교사가 되려고 오늘도 최선의 노력을 다합니다."